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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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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드나 전투는 기원전 168년, 로마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벌어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이다.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 왕은 로마에 대항하여 군비를 증강하고 페르가몬을 침공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로마는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그리스에 파견했고, 페르세우스는 피드나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전투는 로마 군단의 유연한 전술과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약점 노출로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의 결과로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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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드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피드나 전투
갈등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전투 배치도
날짜기원전 168년 6월 22일
장소피드나 근처
결과로마의 승리
마케도니아 멸망
교전 세력
교전국 1로마 공화국
교전국 2마케도니아
지휘관 및 지도자
로마 공화국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P.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마케도니아페르세우스
병력 규모
로마 공화국30,000명
마케도니아28,000 - 37,000명
사상자 및 피해
로마 공화국알 수 없음
마케도니아31,000명
사망: 20,000명
포로: 11,000명

2. 배경

기원전 179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페르세우스는 북방의 야만족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아버지의 친로마 노선에서 벗어나 반로마 노선으로 전환했다.[27]

군비 증강 후, 마케도니아는 페르가몬 왕국을 침공했다. 페르가몬 왕국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했고, 로마는 이에 응하여 그리스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로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했다. 초기에는 마케도니아군이 로마의 육군과 해군에 대해 우세를 보였다. 이에 로마는 기원전 168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집정관으로 임명하고 그리스에 파견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했다.[27]

그리스에 도착한 파울루스는 곧바로 페르세우스와의 전투를 준비했다. 페르세우스는 주변을 성벽과 울타리로 방어선을 튼튼히 하고, ‘올림포스의 산자락이 바다에 가라앉은 근처’에 진을 치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27] 며칠 동안 양군은 대치했고, 파울루스는 주변을 조사하여 피티온과 페트라를 거쳐 페라이비아로 빠지는 길이 무방비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8,200명의 보병과 120기의 기병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에게 주어 그 길을 통해 해안 지역까지 우회하여 적을 포위하는 척하게 하였다.[28] 그러나 이 계획은 로마군에서 탈영한 크레타인에 의해 페르세우스에게 알려졌다. 페르세우스는 용병 10,000명과 마케도니아 병사 2,000명을 미론에게 주어 적을 상대하게 했다.[29] 그러나 미론은 나시카에게 패배했고, 이 소식을 들은 페르세우스는 피드나로 후퇴했다. 당시 마케도니아군이 진을 친 곳은 평탄한 지형으로 팔랑크스가 배치하기에 적합했다.

나시카의 부대와 합류한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군 맞은편에 진을 쳤다. 그날 밤 월식이 일어났다. 파울루스는 월식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마케도니아군은 로마군이 달빛을 되찾는 의식을 치른다고 생각하여 월식을 두려워하며 왕이 멸망할 징조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군의 사기는 전투를 하기도 전에 이미 떨어져 있었다.[27]

3. 전개 과정

기원전 168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집정관으로 임명되어 그리스에 파견되었다. 파울루스는 페르세우스와의 전투를 신속하게 시작했다. 페르세우스는 성벽과 울타리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올림포스 산자락이 바다에 가라앉은 근처'에 진을 치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27] 며칠 동안 대치하던 파울루스는 나시카 코르쿨룸에게 보병 8,200명과 기병 120기를 주어 우회 기동을 시도했다.[28]

그러나 이 계획은 로마군 탈영병으로 인해 페르세우스에게 누설되었다. 페르세우스는 밀론에게 용병 10,000명과 마케도니아 병사 2,000명을 주어 나시카를 막게 했다.[29] 그러나 밀론은 패배했고, 페르세우스는 피드나로 후퇴했다. 마케도니아군은 평탄한 지형에 팔랑크스를 배치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나시카 부대와 합류한 파울루스는 마케도니아 군 맞은편에 진을 쳤다. 그날 밤 월식이 일어났는데, 파울루스는 이미 월식에 대해 알고 있었다. 반면 마케도니아 군은 월식을 불길한 징조로 여겨 사기가 저하되었다.[3]

4. 대회전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전투는 다음 날 오후에 파울루스가 적의 공격을 유발하기 위해 재갈을 물리지 않은 말을 풀어놓게 하거나, 로마군의 말을 트라키아 병사가 공격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 혹은 로마군의 말을 마케도니아 측의 트라키아 병사가 덮쳐, 로마 측의 리구리아 병력 700명이 교전을 시작했고, 여기에 가세하면서 전투가 확산되어 양군의 전면 충돌을 가져왔다고 전한다.[30]

초반에는 팽팽하게 전투가 진행되었지만,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결국 로마의 전위를 돌파했다.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사리사(마케도니아 팔랑크스가 이용한 장창)의 숲에 파울러스는 경악했고, 공포를 느꼈다. 또한 그 후방의 부대도 찢어지는 바람에 로마군은 오로크론이라는 산까지 후퇴했다. 추격을 하는 동안 마케도니아 군 팔랑크스는 대열이 흐트러져, 전열이 길게 뻗어 틈새와 균열이 생겼다. 그래서 파울러스는 부대를 작게 나누어 적이 분열된 틈이나 균열을 집중 공격하였고, 각개 격파를 명령했다. 백병전이 시작되면 사리사는 쓸모없기 때문에, 마케도니아 군은 사리사를 버리고 싸웠다. 그러나 단검과 작은 가죽 방패로 로마군의 검과 크고, 무거운 방패를 감당할 수 없어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마케도니아 군의 정예 부대 3000명은 도주를 포기하고 싸웠지만, 전멸했다.[31]

전투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교전은 한 시간 정도에 끝났다.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은 25,000명 이상이 전사했지만, 로마군의 전사자는 포세이도니오스에 의하면 100명, 나시카에 따르면 80명뿐이었다.[32]

폴리비오스는 페르세우스가 전투 초기에 겁을 먹고 거의 모든 기병을 이끌고 도망쳤다고 전했지만, 포세이도니오스는 페르세우스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적이 던진 창에 부상을 당해 전장을 떠났다고 전했다. 모두 플루타르코스에 의해 전해진 내용이다.[33]

5. 결과



피드나 전투에서 패배한 페르세우스는 병사와 주민들에게 버림받고 재산을 빼앗긴 채 사모트라케 섬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로마군에 붙잡혔다.[25] 그는 로마로 압송되어 파울루스의 개선식에 아이와 함께 구경거리로 끌려다닌 후 연금되었다가 옥사했다.[26]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패전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네 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가 결국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이는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63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년)로 이어지는 헬레니즘 3왕국이 로마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신호탄이었다.

피드나 전투는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사실상 종식시켰으며, 정치적으로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페르세우스는 로마에서 개선 행렬에 사슬에 묶여 전시된 후 투옥되었다. 원로원은 왕의 친구들을 이탈리아로 추방하고 페르세우스를 알바 푸첸스에 투옥(이후 가택 연금)하는 결정을 내렸다.[14][15]

마케도니아 왕국은 해체되어 서로 교류나 교역이 제한된 네 개의 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역시 해체되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기원전 167년, 파울루스는 에피루스를 공격하여 15만 명의 에피로테인을 노예로 만들고 70개 도시를 약탈했다.[16] 이는 몰로시족이 페르세우스를 지원했기 때문이지만, 모든 에피로테인들이 로마의 공격으로 고통받았다.

이 승리는 아테네에서 축하받았으며, 기원전 168년 평의회와 인민은 피드나에서 로마군 및 아탈리드 군과 함께 있었던 아테네 시민 칼리파네스에게 승리 소식을 가져온 것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칙령을 통과시켰다.[17]

6. 평가

피드나 전투는 로마 군단의 유연성이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경직성을 이긴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현대에는 페르세우스의 지휘 실패와 기병대의 소극적인 역할이 패배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13]

6. 1. 군사적 측면

피드나 전투는 로마 군단의 유연성이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경직성을 이긴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로마군은 긴 칼과 무거운 방패를 활용한 근접전으로 코피스와 가벼운 방패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군을 제압했다.[13]

그러나 현대에는 페르세우스의 지휘 실패와 기병대의 소극적인 역할이 패배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13]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르세우스의 기병은 전투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고, 이는 보병들에게 비겁하다는 비난을 받았다.[11]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 대형의 약점을 보완하고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3,000명의 정예 친위대는 팔랑크스 대형을 오래 유지하며 분전했지만, 결국 전멸했다.[11] 이는 훈련 수준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준다.

참조

[1] 서적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 World’s Major Battles and How They Shape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 웹사이트 Battle of Pydna https://www.worldhis[...]
[3] 서적 Roman Lives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4] 문서
[5] 인용 Livy
[6] 간행물 Not so different: individual fighting techniques and small unit tactics of Roman and Iberian armies within the framework of warfare in the Hellenistic Age. 2006
[7] 인용 Livy
[8] 인용 Livy
[9] 인용 Livy
[10] 인용 Livy
[11] 인용 Livy
[12] 문서
[13] 문서
[14] 인용 Livy
[15] 인용 Livy
[16] 인용 Livy
[17] 웹사이트 IG II3 1 1334: Honours for the soldier Kalliphanes, messenger of the Roman victory at Pydna https://www.atticins[...] 2022-10-25
[18] 문서 プルタルコス, 「アエミリウス・パウルス」, 13
[19] 문서 ibid, 15
[20] 문서 ibid, 16
[21] 문서 ibid, 17
[22] 문서 ibid, 18
[23] 문서 ibid, 21
[24] 문서 ibid, 19, 23
[25] 문서 ibid, 23, 26
[26] 문서 ibid, 34
[27] 문서 [[플루타르코스]], 「아이밀리우스」, 13
[28] 문서 ibid, 15
[29] 문서 ibid, 16
[30] 문서 ibid, 18
[31] 문서 ibid, 21
[32] 문서 ibid, 21
[33] 문서 ibid, 1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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